담임목사 칼럼

비참한 마지막

By 2020년 10월 29일 11월 1st, 2020 No Comments

본문: 예레미야 52:1-11
찬송: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포위된 예루살렘

시작보다 마지막이 어렵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시작할 때 소망으로 달리지만 끝까지 경주를 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 경주를 완주한 사람은 모두 승자입니다. 목적지까지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 경주를 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등을 하려고 하는 열망 때문에 실패합니다. 일등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달리려고 하십시오. 이것이 충성입니다.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순종에 빚을 졌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왕을 세워주시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윗과의 언약은 이제 시드기야 왕에서 끝을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이 되고 11년을 통치하면서 하나님에게도 반역하고 바벨론 왕에게도 반역합니다.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시드기야 통치 9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부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11년 사월 구일까지 버티던 예루살렘 성안에는 굶주린 자들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성벽은 무너지고 군사들은 도망하였습니다. 시드기야왕은 도주하여 아라바길로 갔다가 여리고 평원에서 사로잡힙니다. 하맛 땅 리블라에서 재판을 받고 아들들의 죽음을 보고 눈이 뽑힙니다. 청동족쇄로 묶여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는 비참함의 상징이 됩니다.

눈을 뽑힌 왕

불행한 시드기야는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왕으로서의 영광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깁니다. 자기 자식들마저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바벨론왕의 잔인한 판결은 시드기야의 눈으로 본 마지막 장면이 자기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들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왕은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죽는 날까지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는 이미 시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비극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사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하소연합니다. 지금이라도 비극의 시작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참한 마지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의 시력입니다. 이 시력이 손상된 성도는 지금도 세상의 것들을 놓지 못합니다. 영원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려 놓지 못합니다. 이미 시력을 잃은 분들도 계시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희미하게라도 두 눈으로 보고 살아갑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편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기도제목

1.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소식을 전해 주소서. 마지막까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함락되는 불행한 길에서 건져 주소서.
2. 믿음으로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편함보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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