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By 2019년 6월 8일 No Comments

본문: 예레미야 11:18-12:6
찬송: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아나돗 사람들의 위협.

선지자의 사명은 보냄받은 곳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이 메시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당할 고난을 먼저 체험해야 했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과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헤치려고 달려드는 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있는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이런 음모를 예레미야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축복이 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길을 동일하게 경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더 미워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우리 손에 죽으리라” 예레미야는 그들의 위협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은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수님의 자리에서 사명을 다한 예레미야처럼 우리의 사명도 동일하여야 합니다.

악인으로 인한 고통의 목적.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더 강건한 사명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질문을 꾸중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우리의 어리석은 질문에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더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변론해야 합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입술은 주님께 가까이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께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나를 괴롭히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손에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라는 성도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그가 우리의 종말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너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군사들의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악인으로 인한 고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를 말과 함께 경주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만 흘리던 연약한 예언자가 아니라 말과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위대한 용사가 됩니다.

기도제목.

1.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도리어 핍박을 당하게 됨을 봅니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을 지키게 하소서.
2. 악인들의 번영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을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사람들과 경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말과 함께 경주하는 사명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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