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3:11-26
찬송: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생명을 원망하는 사람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너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초대하시고 함께하는 멍에와 가벼운 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삶의 무게는 언제 사라집니까?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입니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살고 싶은 것입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겨울 뿐입니다. 생명을 멸하기 원하는 원수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길에서 떠나기를 원하시는 지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욥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그 뒤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지키고 계셔서 그의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삶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삶을 망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죽음 같은 현실 가운데 신음하고 태어난 날을 원망하는 당신에게 다시 소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좋은 소식입니다.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대단합니다. 왜 근심이 됩니까? 살고 싶어서 입니다. 왜 염려하십니까? 살고 싶어서 입니다. 죽음을 갈망하는 자는 없습니다. 오직 사탄이 죽음을 갈망합니다. 죄의 결과로 채무자를 쫓는 자와 같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욥으로 하여금 수 많은 죽음을 갈망하게 했습니다. 모태에서 태어난 순간에도, 누군가가 그 아이를 무릎에 받아 주었던 순간에도, 젖을 먹인 유방과 누워 잠 잘 수 있던 요람에서도 죽음을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망은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지금의 고통을 피했을 것이라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실 수 없는지 물으셨습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은 위대합니다. 죽음을 통과함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죽음을 갈망하는 자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요구하는 자리이지만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죽음처럼 다가올 때 생명의 소망이 시작됩니다. 죽음 같은 현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길이 시작됩니다.
기도제목
1. 생명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집니다. 죽음을 통과한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 죽음을 갈망하는 그 마음 속에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죽음 같은 현실을 이겨낼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