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사랑의 아픔

By 2020년 6월 18일 No Comments
본문: 신명기 32:15-36
찬송: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하나님을 버린 여수룬 

사랑하는 사이에도 자존심이 문제가 됩니다. 고백을 할 때에도 누가 먼저 고백했느냐 따집니다. 이별을 할 때에도 누가 먼저 이별을 고하는 자가 되는지에 따라 아픔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버림받는 자도 내가 버렸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여수룬은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배신한 이스라엘을 여수룬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고 내 눈에 사랑스러워 보여야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배신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배신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자기도 동일한 복수를 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한만큼 아픔도 커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은 다시한번 무너집니다. 생명을 내어주고 사랑한 여수룬이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자입니다.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 고맙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는 소유하고 싶어하는 감정 그 이상입니다.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어찌보면 분노에 더 가까운 강렬한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모든 것을 이해하며 너그럽게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질투의 창문으로 바라본 사랑의 대상은 원수와 같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장 차이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하는 심판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불을 붙이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의 소산을 삼기고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표현이 분명합니다. 여수룬을 빼앗긴 하나님의 진노가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콤을 만나면 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만든 원수들을 멸하고자 하는 전능자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만큼 진노의 크기도 동일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화를 낼 이유도 없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십니다. 끝까지 그 사랑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배신한 자들 때문에 경험하신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본래 아픈 것이 맞습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을 배신하고 무너진 우리를 향하여 사랑의 손을 거두지 말아 주소서. 자격없는 자에게 여수룬이라 불러주시는 그 은혜를 깨닫게 하소서.
2. 하나님이 경험하신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죄로 인한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픈 만큼 성장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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